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공방전 (문단 편집) === [[소련군]]의 전쟁범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파일:Berlin54.jpg]] 독일 민간인의 자전거를 구입하려다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련군 병사. 실랑이의 원인은 자전거를 구입하겠다는 소련 병사의 말을 독일 여성이 못 알아들어서[* 저 소련군이 [[러시아어]]로 소통을 시도해서 아예 언어 차이로 인해 대화가 안 됐거나, 소련군이 [[독일어]]로 소통을 시도했으나 독일어가 서툴렀거나 러시아 억양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해서 말을 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독일어에 능숙한 소련군 장병이 통역을 해 줘서 실랑이가 풀렸다고 한다.]였다.([[https://www.gettyimages.no/detail/news-photo/misunderstanding-ensues-after-a-russian-soldier-tries-to-news-photo/613492500|#]]) 헌데 이 사진은 소련군이 자전거를 구입하려고 하다가 말이 안 통해서 저러는 건데 구도가 마치 소련군이 저 여성의 자전거를 억지로 강탈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소련군의 약탈 사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우린 점령 지역에서 가끔 마주친 여자들을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강간했다. 부대원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윤간했다. 폴란드 여자는 집으로 돌려보내주었지만[* 이 증언을 한 병사의 부대에서는 부대장이 이런 원칙을 세워 폴란드 여성은 돌려보냈을 지도 모르나, 당시 소련군의 점령지역 약탈 및 강간은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에 소련편이었던 국가의 여성이나 나치 독일의 피해국인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여성들도 소련군이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애초에 소련군 최상위 지휘부의 공식적인 원칙은 강간을 하지 말자는 쪽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고, 부대 간부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현재 조사된 기록상 독일계가 아닌 순수 폴란드계 여성도 최소 100,000명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했다. --사실 전세가 뒤집히기 전 나치 독일군의 전성기였던 전쟁 초•중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폴란드 여성이 독일군에게 강간당했다--] 독일 여자는 폭행하고 학대했다. 마지막에는 총으로 쏘아 죽였다. >---- > 어느 소련 병사의 증언 > 당신은 당연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었겠지요? 당신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알겠죠? 그렇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베오그라드까지 전우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주검을 넘어서 쑥대밭이 된 조국의 땅 수천 km를 지나며 싸워온 남자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그런 남자가 어떻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참상 뒤에 그가 여자하고 재미 좀 보는 것이 뭐 그리 심한 일인가요? 당신은 붉은 군대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붉은 군대가 독일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 >---- >포화 속에 수천 km를 달린 병사들에게 [[강간|그런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https://en.wikipedia.org/wiki/Milovan_%C4%90ilas|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 그러나 이것의 출처는 밀로반 질라스의 회고록이고, 회고록은 질라스가 반공주의자로 전향한 뒤에 작성되었다는것을 감안하면 신뢰도가 높지 않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뒤, 소련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참혹한 학살극을 직접 보고 들으며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수많은 약탈과 강간이 벌어졌다. 역사가들은 소련군에 강간당한 여성은 최대 2,000,000명, 베를린에서만 100,000명 가량의 독일인 여성이 강간당했고, 10,000명이 그 여파로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고아와 임산부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하우스 데흘렘(Haus Dehlem)에서는 갓 출산을 끝낸 여성들과 임산부들까지 소련군에 강간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1945~1946년 사이에 전시 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라 집계될 정도였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런 비행을 알고 있음에도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병사들의 비행이 지나치며 점령지 통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NKVD]] 소속 부대를 동원해서 단속에 나섰다. 강간범들은 피해자 앞에서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유명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굴라크]] 감방 동기 두 명은 바로 이렇게 잡혀온 강간범들이었다. 소련군 사령부나 [[내무인민위원회]]가 주둔군 병사들의 비행을 스탈린에 대한 불경을 범한 정치범(= 솔제니친)과 똑같은 중범죄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역사가 노먼 나이마크는, 종전 시점인 1945년에 가장 많은 강간이 일어났지만, 1947~48년 겨울에 항구적인 부대 주둔지가 마련되어 부대장의 허가없는 [[외박]]이 금지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고 지적한다. 강간 피해자는 최연소가 8세였고, 최고령이 80세였는데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독일에서 여자만 보이면 잡아다가 강간했다.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의 영부인 한네로레 콜도 12세 나이에 모친과 함께 소련군에게 강간당해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말년에 건강을 비관하여 자살했다.[* 참고로 전후 1950년대에 소련과 [[동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위해 방문했으나 오히려 피해자들이 그 정도 해준 것만도 되려 고맙다고 말한 바 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출처나 진위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동독 민간인들은 소련이 베를린에 세워놓고 간 소련군 무명용사의 무덤을 "무명강간범의 무덤"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자신들에게는 반성이 "강요"되고, 소련군의 비행에는 면죄부가 주어진 것을 동독인들은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냉전]] 말에 소련과 동독 정부가 당시 피해자들 중 일부에게 어느 정도의 배상을 한 적이 있고, 전후 소련에서 배상은 못해도 사죄는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일부 있긴 했다. 소련과 동독이 전후 배상하려 했다는 것을 두고 '이는 동독과 소련측의 주장이니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악담하는 경우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은 전쟁법과 전쟁 [[관습법]]에 의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대의가 있다고 해서 민간인 개개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전쟁사학자 앤서니 비버는 소련군이 나치의 세계 정복을 막아낸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이지만, 독일 여성들에 대한 소련군의 보복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강간이었다고 혀를 찼다. 소련군이 이 같은 행위를 벌인 이유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은 약 2,000~2,700만 명의 인명피해를 겪었다. 즉, 이들이 저지른 짓은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단 단순히 복수심과 스트레스에서 발로된 것이다. 사실 강간 뿐만 아니라 이 복수에서 기인한 수많은 범죄들도 있었다. 하지만 복수라 해도 본인과 직접적으로 얽힌 바 없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강간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며, 이는 누구보다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에 가득 찼던 소련군 수뇌부조차 주지한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점령군에 의한 집단 강간은 독일군으로부터 영토를 탈환한 후, 프랑스군 및 민간인들에 의해서도 많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미군]]이나 북유럽 쪽에서도 성폭력 사례들이 있다.] 다만 피해 대상자가 독일인 여성이라기보다는 [[환향녀|독일인과 성관계를 한 적이 있었던 프랑스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소련군이 한 성폭력이나 프랑스인이 한 성폭력이나 국가간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군인의 전시 성폭력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런 반면 소련 당국은 [[독일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식량 보급에 힘썼는데,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자마자 점진적으로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으며 1947년에 본격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 나오듯이 점령군에게 [[성상납|몸을 바쳐]] 배급이나 안전을 확보하려는 독일 여성들도 꽤 있었다. 소련군의 약탈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상당한데 [[냉전]] 시기 영•미 측의 [[선전]]으로 부풀려진 것도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병사들이 독일에 진입하고 나서 민가의 수도꼭지를 죄다 빼갔는데 이를 본 장교들이 왜 그걸 빼 가냐 물었더니 병사들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한다." 는 말을 하며,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 줄 알았던 것이었다는 신빙성이 희박한 이야기이다. 이미 당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물론, 여러 지역들에는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상수도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신병훈련소에서도 수도꼭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나온 유일한 근거는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인데, 이 책은 영•미권에서 냉전시대에 학자가 아닌 언론인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검증없이 받아들인 내용이 상당하다.[* [[https://v.daum.net/v/20230217171516485|그런데 2023년 현재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유럽연합이 러시아를 상대로 변기 등 화장실 용품 수출을 제한하자 러시아군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변기를 약탈해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사실 종전 후 미국과 서독에서 [[반공주의]]가 성행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전쟁 범죄는 과장하고,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나 서방 연합국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는 어둠 속으로 묻히게 되었다.[* 물론 추축국 가운데 나치와 일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련군 역시 연합군 내에서 가장 잔악한 군대였다. 미군과 영국군은 [[카틴 학살]]과 같은 점령지 내 민간인 대학살은 물론 추축국 민간인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은 되도록 자제한 편이었다. 반면 소련군은 주요 추축국 3국 중 가장 온건했던 이탈리아보다도 훨씬 악질적이었다. 단지 소련은 주요 승전국이었고, 또한 독소전쟁에서의 피해가 소련이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등 주변국에 입힌 피해를 크게 초월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전쟁범죄는 유야무야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서독에서 역시 즉각적인 나치 청산이 흐지부지되어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 청산까지 약 20년 가량을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 분위기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히틀러가 독일에서 절대악처럼 비판받게 된 것은 더 훗날의 이야기이다. [[미국]]은 [[소련]]을 적으로 삼고, [[반공]]을 강조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관련된 과거사 청산에 비교적 소홀했다. 참고로 서독이 지금과 같이 나치즘 관련 과거사 반성에 철저하게 된 것은 [[68운동]]과 [[동방 정책]] 이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